소개
예배와 양육, 교제 등을 통해 우리교회가 아닌 함께하는 교회로 이 지역에 자리잡기를 소망합니다

종민 從民/산호자 散壺者/ 일호一毫 허태수

내 처음 별호(別號)는 [종민 從民]이다. 한국 최고의 전각장인 현노 최규일 선생이 정릉에 머무를 때 영문학자 안동민(‘이 한 장의 명반’ 저자)교수와 비오는 날 함께 가서 얻었다. 현노 선생은 지금 횡성 공근 고향에 낙향해 있다.

내 친구 중에 하창수 라는 소설가가 있는데, 친구가 어느 날 밤에 불쑥 내 별호를 [산호자 散壺者]라고 지었다.

현노 선생은 ‘사람을 따라, 사람을 위해’살라는 뜻에서 [종민 從民]이라 했고, 소석(素石)하창수는 ‘항아리를 깨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지었다. 그래선지 내 생애의 40대는 광기 서린 나날이었다. 나이 들어 지금은, 스스로 나를 내려놓겠다는 뜻으로 [일호一毫]라고 쓴다.

고등학교 1학년에 질병을 얻어 절망에 빠졌다가 치유의 은혜를 입었다. 신학교를 가야한다는 시대적인 분위기의 내면적 압박을 받아 입학을 했지만 적응을 하지 못하고 휴학했다. ‘하나님’에 대해서 쓰라는 중간고사 문제에 ‘하나님을 어찌 글로 쓰느냐’고 선생에게 물은 게 발단이었다. 바로 그때 전남에 사는 소남자(小南子) 김재섭 이라는 재야 한학자를 만났다. 아니 ‘만났다’기 보다는 내가 장성군 북이면 신평리로 찾아가서 만났다. 그는 시인 천상병의 친구였다. 그로부터 인사동에서의 삶이 4년 반 시작 되었는데, 거기서 숱한 대한민국의 인물들을 만났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인사동을 떠돌던 인사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억지 춘양이 같이 신학교와 춘천으로 돌아갔다.

제도와 종교적 관성 그리고 무지한 구성원들의 불편한 이해와 움직임을 극복하고 1993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니까 이 교회에 1982년에 와서 1993년에 목사가 되고 이때까지 있으니 목사가 된 햇수로는 23년, ‘목회’랍시고 교우들의 연보로 호구와 연명을 한지는 34년 째 된다. 이쯤 되니 비로소 사람과 성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관통貫通]의 바람이 분다. 관통이란 별 거 아니다. 몸도 마음도 혼도, 오늘이나 내일, 삶이나 죽음이 서로 친해지는 거다.

지금 나는 그런 눈으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성서를 읽고 있다. ‘성경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서, 역사 가운데, 사람들의 삶의 문제와 직면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다. 이런 경험들은 보편화, 교리화, 교조화, 절대화 할 수 없는 극히 주관적인 체험이며 상대적인 가치들이라, 내가 교우들에게 던지는 언어들은 답 없는 질문과 같다. 그러니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자기의 경험, 신앙적 교리, 체험 등을 붙들고 있는 이들에겐 답답할 거고, 유효기간이 지난 우유 버리듯 과감히 자기를 뭉개고 새 젖을 찾는 이들에겐 세상이 주지 않는 기쁨으로 작용할 것이다.

콧구멍을 간질이는 터럭 하나가 재채기를 일으켜 온 몸을 진동케 하듯, 후후 불어대는 내 가벼운 존재의 터럭에 채여 잠자던 혼 하나 깨어나면 족하겠다.

sanhoza@hanmail.net